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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104] 내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사람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0-12 13:51:19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2)

▩김시린(왕청)

개혁개방 후 마음껏 애들을 가르친 한채순선생님

나에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 몇분 있다. 사정없이 흐르는 세월에 나이 들수록 그들에 대한 생각이 더 짙어지며 그 때의 장면들이 영화필림마냥 머리에 떠오르군 한다.

내 일생에서 첫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은 나의 계몽선생 한채순선생님이다.

소학교 1학년 때 공부하기 싫어하는 나는 오후에 나머지 공부를 자주 하였다. 1964년으로 짐작되는 12월달 추운 겨울의 어느 날 오후였다. 그 날도 나는 다른 애들과 같이 나머지 공부를 하게 되였다. 다른 애들은 선생님이 몇벌 쓰라는 것을 열심히 다 쓰고 련속 집으로 갔지만 나만은 쓰는둥 마는둥 하며 그냥 교실에 남아있었다. 짧은 겨울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며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죄꼬만 내 생각에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선생님이 꼭 집으로 보낼 것이라는 못된 생각을 한 것이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빗나갔다.

선생님은 다 쓰고 집으로 가는 애에게 오늘 나를 집으로 안 보낸다는 글쪽지를 우리 집에 보냈다. 교실엔 나 혼자 남았고 날은 어둡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은 마치 누나가 동생을 보살피듯이 “네가 이런 맵시로 추운 3리길 학교를 어떻게 다니였느냐.”라고 말하며 털이 다 빠진 나의 털모자를 꽁꽁 눌러 씌우고 웃옷 단추도 꼼꼼히 채운 후 나의 손을 잡고 교실문을 나섰다. 당시 깁고 또 기운 옷에 추워도 단추를 잠글 줄 몰랐던지, 털모자 끈도 매지 않았던지 학교로 다닐 땐 몹시 추웠는데 웬 일인지 그번 길에서는 이왕처럼 춥지 않던 것이 몇십년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날 선생님은 나를 학교와 가까운 선생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 저녁을 먹인 후 밥상을 펴놓고 나더러 학교에서 안 쓴 걸 계속 쓰라고 했다. 더는 뻐길 수 없어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번 나머지 공부를 완성하였다. 공부가 끝나니 선생님의 어머님은 나에게 닦은 콩을 내주었다. 그 맛이 얼마나 좋던지. 이렇게 그 날 나는 선생님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을 먹은 후 누나와 같은 자애로운 선생님을 따라 학교로 갔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그 하기 싫은 공부에 다시는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어찌 나 뿐이랴! 그 때 우리 반에는 엄마 없는 아이가 있었다. 당시 모두들 생활이 극히 곤난할 때인지라 엄마 있는 애들도 잘 입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엄마 없는 애들이야! 그 애는 첫눈 오는 날까지도 내복도 없이 마대천 바지에 맨발로 학교로 와서는 추워 엉엉 울기까지 하였다. 그 날 선생님은 그 애에게 솜신과 솜바지도 사 입혔다. 당시 어린 나의 마음에는 나도 저렇게 새 솜신 새 솜바지를 입었으면 하면서도 저 애는 선생님이 저렇게 안 사주면 얼어죽으니 잘되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우리 반에는 공부엔 뒤전인 아이가 있었는데 한채순선생님은 나를 공부시키던 방법으로 그 애를 거의 열흘이나 선생님 집에 데려다 놓고 배워주며 공부를 시켰다. 이에 그 애 엄마는 “선생님의 이 은공을 어떻게 갚겠느냐”며 버릇처럼 외웠다. 당시는 집집마다 량식고생을 할 때이고 선생님은 또 민반교원으로 로임도 높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헌데 안타깝게도 인차 문화혁명이 터지고 선생님의 아버지가 반역자로 몰려 투쟁받으면서 한채순선생님은 우리 고향보다 더한 두메산골 학교로 쫓겨가듯 전근되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개혁개방을 맞으며 한채순선생님은 성우수교원까지 되였고 후에는 정년퇴직을 하였다.

또 한분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은 뻐스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다.

아마 1967년말 아니면 1968년초로 기억된다. 어느 추운 날 나는 어른들 심부름으로 우리 마을에서 40여리 떨어진 배초구 큰형님 집으로 가게 되였다. 나는 늘 아동표로 뻐스를 탔기에 어머님은 아동표 돈도 겨우 마련해 나에게 주었다. 차에 올라 표를 사라는 차장의 말에 반표 돈을 내놓으니 안된다며 기어코 성인표를 사란다. 내 기억엔 그 돈 차이가 10전이던지 20전이던지. 돈이 없다 하니 이제 곧 도착하게 될 마을 정거장에서 내리란다. 나는 이제 차장이 기어이 내리라 하면 이왕에 걸어보았던 20리 길을 걸어 되돌아올가 아니면 한번도 다녀보지 못한 길을 물으면서 계속 큰형님네 마을까지 걸어갈가 생각하면서 또 차장이 나를 가엾게 여겨 반표를 떼주기도 행여나하고 바랐다.

첫 정거장 마을에 도착하여 뻐스가 서니 녀차장은 나를 무조건 내리라 호통쳤다. 방법 없어 내리고 나서 나는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법석이는 뻐스 문을 쳐다보며 서있었다. 사람들이 거의다 오를 무렵 뻐스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에 쳐다보니 뻐스 안에서 웬 애기 업은 아주머니가 손짓으로 나더러 뻐스에 오르라고 하는 것이였다. 영문을 몰랐지만 어른이 오르라기에 키가 작은 나는 제일 마지막 사람으로 뻐스에 다시 오르는데 차장은 왜 오르냐며 소리쳤다. 이 때 그 애기 업은 아주머니가 “옛다, 여기 돈이다!” 라고 차장에게 툭 쏘아붙이며 돈을 내놓았다. 그 때 나는 어른들 끼리 툭 쏘아붙이는 장면을 처음 보았는데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투는 바로 이 추운 날 그까짓 돈 몇십전때문에 이 조그마한 아이를 중도에서 내려놓으면 어쩌냐는 의미였다.

그 때 만약 그 아주머니가 아니였다면 나는 제대로 입지도 못한 옷차림으로 20리 길에서 헤매다가 엄중하면 얼어죽을 수도 있는 것이였다. 이렇게 면목도 없고 성씨와 이름은 더욱 모르는, 그저 애기를 업은 아주머니로 기억되는 고마운 아주머님 덕에 나는 큰형님네 집으로 무사히 갔었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그 아주머니를 찾아 인사말이라도 하고 싶지만 50여년전 20여세의 새각시 애기엄마가 지금은 70-80여세 로인으로 되였을 텐데 어디 가 찾을 길 바이 없다. 그저 이렇게 글로 쓰는 것으로나마 그 분에게 고마움을 표달할 뿐이다

또 한분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사람이 있다. 한겨울 논두렁 눈길에 넘어져 운신 못하는 우리 어머님을 집에까지 업어온 낯도 코도 모르는 한 사나이다. 골절된 어머니 다리 치료에 바삐 돌다가 며칠 후에야 고마운 사람을 찾아나섰는데 끝내 찾지 못하고 그냥 고마운 사람으로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 때 그 분이 아니였더라면 나의 어머님은 추운 겨울 자칫 얼어 저세상에 갈수도 있었다.

이런 고마운 사람들이 항상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기에 나는 지금도 어디에서든 도움이 수요되는 사람만 있으면 있는 힘껏 도와나서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이같은 고마운 사람들로 하여 더 따사롭고 더 아름다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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