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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연변추억9]농학원의 림시 일어선생으로 일했던 추억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9-18 10:56:27 ] 클릭: [ ]

아키코녀사의 연변추억9

농학원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강의하고 있는 아키코녀사

룡정의 곳곳마다에는 아키코녀사의 짙은 추억이 남아있다. 윤동주무덤의 발견과 그 사적 조사에 정력을 몰부은 남편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의 조수 역할을 해온 그 로고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녀사이시다. 단지 룡정사람들에 대한 추억과 일송정에 대한 감격은 그 누구보다도 많고 짙은 것 같았다.

룡정에 대한 아키코녀사의 추억이다.

나는 자격증도 없으면서 일본어교사로 되였다. 룡정시에 있는 연변농학원 일본어양성반의 주임교수인 K선생이 연변대학에 일본인 주부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던것이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들어보니 교사라고는 하지만 일상 회화련습과 그 회화 상대로 되여달라는 부탁이였다. 일본에서 나서 자라고 47살까지 살아왔으니 일상대화의 훈련상대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중국 각지의 농업대학에서 뽑힌 청년들이 이불짐을 지고 긴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연변에 왔다는 말에 무척 호기심이 들었다.

학생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앞줄 가운데)

연변대학과 농학원 사이에 어떤 협상이 되여있었는지는 잘 몰라도 나의 신분을 연변대학에서 보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농학원에 가서 강의를 하면 연변대학에서 나를 농학원에 빌려주는 것으로 된다고 했다. 때문에 농학원에서는 연변대학에 200원을 지불해야 했다. 뭐라 할 수 없는 복잡하고 난처한 심정이였지만 받아들였으니 할 수 밖에 없었다. 연변대학 숙소로부터 룡정에 있는 농학원까지 직접 통하는 교통수단은 없었다. 하여 농학원의 하나 밖에 없는 검은색 공용차가 매번 마중하러 오군 했다.

잊을 수 없는 농학원에서의 첫날, 우뚝한 백양나무가 일직선으로 늘어선 울퉁불퉁한 좁은 길을 달리고 있는데 마주하고 달려오는 트럭의 짐받이에 서있던 로동자들이 뭐라고 웨치면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순간 내가 탄 차의 정면 유리가 사면팔방으로 금이 가고 나는 기겁하여 정신을 잃을 번하였다. 뒤좌석에 앉은 나는 바바리코트에 시누이가 선물로 준 넓은 모피목도리까지 일본인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써본 적도 없으면서…

“놀라셨죠?! 괜찮으십니까?” 조선족 운전수의 목소리에 제 정신이 들었다.

드디여 농학원에 도착하여 교실에 들어섰다. 30대 전후로 보이는 훌륭한 청년 20여명의 강렬한 눈빛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여서 기쁩니다. 나는 세 대학생을 키우고 있는 일본의 전업주부로서 보통 아줌마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왔습니다. 여러분들의 고향이야기랑 자아소개와 함께 이야기해주면 기쁘겠습니다. 나도 중국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배우려고 왔습니다.”

아줌마라는 말에 교실의 분위기는 부드러워지고 더듬더듬하면서 자아소개를 하는 학생들의 성실한 모습에 나는 감격했다. 산동성, 료녕성, 내몽골 등 여태 여러 서적들의 책표지에서 밖에 본 적이 없던 중국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농학원 사무실에서 넘겨받은 교과서와는 전혀 다른 ‘나만의 방식으로 , 아줌마류로 가르쳐야지…’하고 속으로 다짐했다.

농학원 교수와 함께

녀성언어, 남성언어, 겸손어 등 “일본사람들은 속으로는 언짢아도 겉으로는 겸손하게 말하는 엉큼한 곳이 있습니다”라고 우스개를 하면서 아줌마교사는 분투하였다. 점심시간에는 학생들과 함께 맛있는 만두와 국을 먹었다. 젊은 료리사가 중얼중얼 하면서 나의 국그릇에 국물만 떠주었다. 이상하듯 그것을 바라보던 반급 반장이 다가와서 고기를 듬뿍 담아내 그릇에 떠놓아주었다. 솔직히 나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반장이 “선생님, 선생님은 원래 조선족이였습니까?”라고 물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맡은 반에는 조선족학생이 세명  정도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한테서 들은 것 같았다. 그 후로부터 한족학생들은 나를 특별히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룡정백화점에서 옷을 샀다. 중국의 솜저고리였다. 좋아하는 어두운 초록색 바탕에 금실로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옷이였다. 드디여 아줌마교사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토록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의 옷은 처음이였다.

학생들과 함께 있는 오오무라 마스오 부부(앞줄 왼쪽 두번째와 세번째 사람)

봄이 되면 연길시로부터 룡정으로 가는 길 량켠에는 사과배꽃이 활짝 핀다. 이 순간도 새콤달달한 사과배맛이 입안을 감도는 것 같다. 일본류학중 “6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읊조린 윤동주시인의 고향인 룡정, 선구자가 말을 달려 인간해방의 우렁찬 웨침을 울렸다는 일송정, 룡정에 대한 슬픈 마음과 애절함은 여태 사라지지 않는다…

개혁개방 초기인 그 때 당시 아키코녀사는 룡정에 발을 들여 놓은 극소수 일본인중의 한사람이였다.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일도 간혹 있었지만 여러모의 리해와 노력을 통하여 사람들 속에 깊은 정을 남겼던 아키코녀사는 무엇보다도 <선구자> 노래의 가사 그대로의 룡정이여서 감동을 받았다고 추억했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본문의 기사와 사진은 저작권이 있기에  <<길림신문>>과 저자의 허락 없이는 무단전재, 배포할 수 없습니다.)

아키코씨의 당시 추억을 담은 연변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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